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상지(相之). 호는 태화(太華), 인암(寅巖). 아버지는 승사랑 한운(漢雲)이고, 어머니는 동지중추부사 박성희(朴聖希)의 딸이다.
1798년(정조 22) 생원시에 합격하고 4부학당에 들었으며, 1800년(정조 24) 진사 노영경과 함께 응제에 1등하여 바로 정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바로, 그해의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국조문과방목, 우계이씨대동보> 이후 춘추관기주관이 되었으며<대동보>, 1801년(순조 1) 규장각 외각관, 1804년 규장각검열, 1805년 안보관, 교서관교리, 1809년 봉상시첨정을 거쳐<일성록, 승정원일기, 내각일력> 1811년 1월 통신정사로 부호군 김이교(金履喬), 통신부사로는 부사직 이면구(李勉求)가 임명되어 파견될 때, 봉상시첨정으로 서 제술관이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동 8월에 통신사로 다녀온 신하들을 포상할 때 상을 받았으며<일성록, 승정원일기>, 그해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사마방목 이봉녕 편> 1813년 6월 외직인 신창현감으로 부임하였으며, 동 11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으니, 충청감사 조정철(趙貞喆)이 계를 올렸다.<일성록> 1820년 문천군수를 거쳐 1822년 안변진관 병마동첨절제사에 이르렀다.<우계이씨대동보, 사마방목 이기령 편> 가선대부 예조참판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세자좌부빈객 홍예문관제학에 추증되었다.<대동보>
* 인암 : 故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2001년 타계)가 30여년 간 자료와 근거를 모아서 정리한 조선문과방목을 찾아보면, 태화공 휘 현상의 호가 인암으로 되어 있다. 이는 취사공 휘 여빈 방조님께서 취사라는 호와 감곡이라는 호를 같이 사용한 것으로 보았을때, 태화공 또한 태화와 인암이라는 호를 같이 사용했음을 알수 있다. 호는 1인당 1개로 규정된 것이 아니기에, 추사공 김정희의 경우는 추사, 완당 등 여러 별호가 있었다고 한다.